Keep Building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도 위로 이어지는 하나의 곡선

요새 쉽지 않다.

새로운 모델들은 계속 나오고, 우리 지표는 지지부진하다. 난세를 뚫어낼 기가 막힌 한 방은 아직 희미하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랜만에 내가 어쩌다 여기서 이러고 있나, 되짚어봤다.

어쩌다 여기에

2020년, 군대에서 돌아와 복학한 나는 StyleGAN이라는 논문을 봤다. AI가 얼굴을 만들고, 텍스트로 그 얼굴을 편집하는 모습을 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 오고 있구나. 뭔가 하나 해야겠구나. 당시 감상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면, 개쩔지?

그래서 개발자 육성 프로그램인 SW마에스트로에 지원했다. 처음으로 팀을 모으고, AI 모델과 서비스를 만들고, 실제 사용자에게 내놓아봤다. 하다 보니 좀 더 해보고 싶었다. 대회에도 나갔고, 난생처음 투자자에게 연락도 받았다. 이거 한번 진짜 창업해봐야 하나. 뭐,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마침 프라이머에서 초기 팀을 모집하길래 지원이나 해봤다. 5분짜리 간단한 발표였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결국 10억 원의 기업가치로 1억 원의 시드 투자를 받았다. 큰돈은 아닐지 몰라도, 아무것도 없던 대학생들에게는 컸다.

법인 설립, 주주 간 지분 조정과 합의서, 정관, 사업자 등록. 난생처음 해보는 업무들이 쏟아졌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인정받은 것 같아서. 뭔가 해낸 것 같아서.

프라이머의 사업 강의와 멘토링을 거치며 앱을 만들었다. 3개월 뒤에는 제대로 론칭도 하고, 데모데이에서 멋지게 발표도 했다. 투자자를 수십 명 만났다. 분위기는 좋았다.

근데, 정작 지표는 안 올라갔다.

투자금과 통장 잔고는 매월 꼬박꼬박 탔다. 멘토링을 받아도 혼나기만 하고 별반 달라지는 게 없었다. 마음은 조급해져 갔다. 이때 피봇 지옥에 빠졌다. 얼굴 편집 AI에서 헤어 추천, 뷰티 커뮤니티, AI 앨범 아트와 이미지 생성 서비스까지. 몇 개월 동안 계속 다른 걸 만들었다.

피봇을 거듭하며 만들었던 얼굴 편집, 헤어 추천, 뷰티 커뮤니티, 앨범 아트와 이미지 생성 제품들의 화면
얼굴 편집 AI → 헤어 추천 → 뷰티 커뮤니티 → AI 앨범 아트 → 이미지 생성. 피봇 지옥.

그렇게 또 6개월이 흘렀다. 잔고에 한 달 치 월급 정도가 남았을 때 마지막 아이템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자, 멘탈이 나갔다.

내가 대체 뭐 하고 있는 건가. 뭐 하려고 이걸 시작했나.

창업 당시의 어려움을 첫 번째 골짜기의 점으로 표시한 개념 곡선

근간에 있던 “왜 하지?”가 무너지니 몸과 정신이 버티지 못했다. 결국 법인을 청산했다. 투자자분들께 사죄하고, 팀원들과 울고불고도 했다.

히말라야에서 가져온 것

집에 와서 누워 유튜브를 보는데, 누가 히말라야를 걷고 있었다. 시간도 많겠다. 며칠 뒤에 있는 비행기를 끊어서 가봤다.

히말라야의 설산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여행 중의 모습
풍경은 끝내줬다.

쩌는 풍경에서 걸으면 뭔가 인생에 대한 마스터 플랜이 생각날 줄 알았다. 그런데 힘들어서 별생각이 안 났다. 풍경은 정말 끝내줬지만.

그냥 AI Product를 한 번 더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 정도가 남았다. 그즈음 GAN이 저물고 Stable Diffusion이 나왔다. 새로운 기술을 보면서 다시 뭔가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더 만들어보기

2023년, NC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Stable Diffusion 기반의 텍스처 생성 연구를 시작했다. 또 한 번 AI 모델과 서비스를 만들고, 실제 사용자에게 내놓아보고, 팀이 구성됐다.

2023년 당시의 생각: 이미지 생성이 상용화되기 시작했으니, 다음에는 텍스처와 3D, 영상, 4D에도 기회가 올 것이라는 가설
당시에는 대략 이런 생각이었다. 이미지 다음에는 텍스처, 그리고 3D. 얼추 맞는 듯?

제품은 VARCO Texture로 진화했다. 사내에서 사용자 테스트도 하고, 소소하지만 유의미한 지표도 많이 모았다. 지금 보면 우습지만, 그때는 그런 숫자 하나하나가 좋았다. 가나요..! 싶었다.

VARCO Texture의 작은 성과를 두 번째 봉우리의 점으로 표시한 개념 곡선

그런데 조직개편과 계약 종료, 이직이 이어졌다. 2024년 말에는 팀에 두 명만 남았다.

개발실의 필요에 맞춰 기존 텍스처의 색이나 상태를 바꾸는 쪽으로 제품의 방향을 바꿔봤다. 실제 게임에 들어간 결과물도 나왔고, 작업시간이 줄어든 사례도 있었다. 그래도 많이 도입되지는 않았다. 기술이 한 번 쓰였다는 것과 제품이 계속 쓰인다는 것은 달랐다.

사실 진짜 그만둬야 하나 싶었다. 입사 이후 가장 힘들었던 때였다. 또 2년차였다.

다시 찾아온 힘든 2년차를 두 번째 골짜기의 점으로 표시한 개념 곡선

어찌저찌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사이 새로운 동료들이 합류했다. 3D와 텍스처를 함께 만드는 팀이 생겼고, 2025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3D 생성 모델과 서비스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팀은 빠르게 커졌다. 만든 것을 사용자에게 내놓고, 반응을 보고, 다시 만들었다. 가입자도 늘고, 생성된 3D 모델도 쌓이고, 돈을 내고 쓰는 사람들도 생겼다. 드디어 가보나..! 싶었다.

VARCO 3D가 성장하던 때를 세 번째 봉우리의 점으로 표시한 개념 곡선

그런데 요새 쉽지 않다. 새로운 모델들은 계속 나오고, 우리 지표는 지지부진하다. 난세를 뚫어낼 기가 막힌 한 방은 아직 희미하다.

지옥의 2년차

되짚어보니 나는 대략 2년을 주기로 뭔가를 만들어왔다. 창업, VARCO Texture, VARCO 3D.

2021~2022년 창업, 2023~2024년 VARCO Texture, 2025~2026년 VARCO 3D로 이어지는 2년 주기의 개념 곡선
실제 지표를 그린 그래프는 아니다. 되돌아보니 오르내림의 주기가 어딘가 비슷했다.

항상 처음 1년은 정말 재미있다.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고, 팀이 생기고, 만들 게 많고, 매일 뭔가 달라진다.

그런데 2년 즈음 되면 달라진다. 쉬운 문제는 대부분 풀었고, 성장은 느려지고, 처음의 새로움은 없어지고, 진짜 어려운 문제들만 남는다.

핵심 지표가 떨어진다. 피봇 지옥에 빠진다. 팀 안에서도 믿음이 작아진다. 바깥의 기술은 엄청난 속도로 앞서간다. 돈이 메마르거나, 운영과 레거시의 문제에 발목이 잡힌다. 제품은 달라졌는데 어려워지는 장면은 어딘가 비슷했다.

2년차에 달라지는 것들: 쉬운 문제는 풀었고 성장과 새로움은 줄어든다. 지표 하락, 피봇, 팀의 믿음, 바깥의 기술, 돈과 운영 문제가 남는다

“That may work for a year or two, but you will burn out.”

1~2년 정도는 통할 수 있지만, 결국 번아웃에 빠지게 된다.

— Sam Altman, Y Combinator · Later Stage Advice for Startups

원래는 휴가 없이 몇 년씩 일하는 창업자들에게 한 말이다. 2년차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답은 아니지만, 오래 만들려면 계속 버티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알았으면 문제가 애초에 없지 않았을까.

좋은 제품과 사업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때까지 무작정 개고생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같은 제품으로 2년차를 견뎌내고, 3년차를 맞이하면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우리 바삼디가 2026년의 골짜기쯤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같은 제품의 다음 해를 상상한 개념 곡선

이번에는 B였으면 좋겠다

3년차를 맞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A는 앞선 제품이 다음 제품의 토양이 되는 것. BiDi에서 VARCO Texture로, 다시 VARCO 3D로 이어진 것처럼. 지나온 경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다음 것을 만드는 데 쓰인다.

B는 같은 제품으로 3년차를 맞는 것. VARCO 3D에서 Better VARCO 3D로.

이번에는 B였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지금의 2년차를 통과해야 한다. 모델의 품질은 실제로 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사람들이 제품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가격과 결제, 구매 과정도 준비돼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사용자가 이 제품을 써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어느 하나도 모델만 잘 만들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품질, 유입, 판매, 사용 이유. 함께 풀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

지금 믿고 가보고자 하는 가설은 이렇다. 3D 생성 모델의 품질이 일정 하한을 넘고, 구매와 유입의 기반을 제대로 갖추면, VARCO 3D는 돈 버는 제품이 될 수 있다.

여전히 가설이다. 실제로 쓸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고, 완결된 사용 사례를 찾고, 사람들이 그 가치를 느껴 다시 돌아오는지 확인해야 한다. 생존 이후에는 최고의 모델이나 더 날카로운 차별점을 만드는 일에도 대범하게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일단 Year 3까지

AI와 Product가 겹치는 영역을 가리키는 Building at the intersection 도식

히말라야에서 돌아올 때 남았던 생각은 AI Product를 한 번 더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 교집합에 있다. AI를 연구하고, 제품을 만들고, 실제 사용자에게 내놓는 일.

지금 내려가는 중인 건지, 다음으로 올라가기 전의 골짜기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저 곡선처럼 결국 올라가게 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그래도 이번에는 같은 제품으로 그다음을 보고 싶다.

Keep Building. 일단 Year 3까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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